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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리아나' 한혜자 "내 작품은 결국 다 '땅'과 연결"
헤라서울패션위크서 '명예 디자이너' 선정…초청 전시 개최
"의상에 디자이너 개성 담아야…40년 전 손님, 딸·손녀와 함께 찾아"

(서울=연합뉴스) 권혜진 기자 = "옛날 작업을 한곳에 모아놓고 보니 내가 미친 듯이 일하며 살았구나 싶네요. 한때는 시간에 쫓겨 하루 한 끼 먹으며 일하기도 했으니 미친 듯이 일한 건 맞네요. 그래도 일이 재미있어 힘든 줄도 몰랐어요."
1972년 이화여대 정문 앞에서 '이따리아나'(ITALIANA)라는 이름을 내걸고 여성복을 만들기 시작해 44년 역사를 지닌 브랜드로 키워낸 국내 1세대 패션 디자이너인 한혜자(71) 씨는 지난 17일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배움터에서 자신의 아카이브 전시를 둘러보며 이같이 말했다.
이번 전시는 서울디자인재단이 '2016 S/S 헤라서울패션위크' 개막을 앞두고 한 씨를 명예디자이너로 추대하고, 그의 업적을 돌아보는 초청 전시를 기획해 열린 것이다.
'촉각'(Tactus)이라는 제목의 이 전시는 다음날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2016 S/S 헤라서울패션위크'의 개막식에 해당한다.
한 씨는 전시장에서 연합뉴스와 만나 "옛날 작업을 한곳에 모아놓고 보기는 처음"이라며 "내가 이렇게 작업을 많이 했나, 미친 듯이 일하며 살았구나 싶다"고 소회를 밝혔다.
패션 디자이너의 작업을 모은 아카이브 전시라고 하면 언뜻 그동안 컬렉션에서 선보인 의상을 모아놨을 것으로 연상되지만 실제 전시장에 걸린 80여점은 의상이라기보다는 미술 작품에 가깝다.
소재부터도 멍석을 만들 때 쓸 법한 거칠고 두꺼운 실부터 코팅한 필름지나 와인잔 등 의상 재료로는 상상치도 못한 재료까지 등장한다.
형태도 실제 몸에 걸치기 보다는 의상을 활용한 일종의 설치미술이라고 하는 편이 적합해 보인다.
그는 "어렸을 때 미술을 하고 싶었는데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면서 생계를 위해 이대 앞에 의상실을 연 것이 이 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라고 말했다.
'이따리아나'라고 이름을 붙인 것도 언젠가는 이탈리아로 유학을 가고 싶다는 염원을 담은 것이었다.
우연히 시작한 일이었지만 타고난 감각과 손재주로 그의 의상실은 곧 북새통을 이뤘다. 맵시 있으면서도 개성 있다는 평가가 더해지며 학생들이 앞다퉈 몰려들었다.
"이대 축제인 '메이데이'가 다가오면 주문이 너무 몰려 밤새우기가 일쑤였어요. 오후 5시께 한 끼 겨우 식사를 했을 정도니까요. 그래도 그때는 일이 재미있어서 힘든 줄도 몰랐어요."
당시 줄을 서서 찾아오던 학생 고객들은 40여년의 세월을 함께하며 이제는 딸과 손녀의 손을 잡고 같이 매장에 온다고 한 씨는 말했다.
주문량만 채우기도 벅찬 상황이었지만 그는 1980년 서울 하얏트호텔에서 열린 섬유예술전시를 시작으로 패션에 조형미를 더한 '아트-투-웨어'(Art-to-wear)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미술을 하고 싶다는 그의 어린 시절 꿈에 한 발짝 더 다가가기 위한 시도였다.
그는 "아트-투-웨어는 누군가에게 팔 필요 없이 만들고 싶은 옷을 하면 되는 거다. 하고 싶은 일을 할 때의 즐거움이란 말로 다 못한다"고 말했다.
패션에서도 한발 앞선 트렌드를 보여줬던 그는 예술 의상에서도 당대로선 상상할 수 없는 소재와 디자인을 선보여 화제를 모았다.
'예쁜 옷'에만 치중하던 다른 작품들과 달리 그는 오히려 기이한 작품을 선택했다.
한 씨는 "인위적으로 가공되지 않은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싶었다"면서 "모든 생명의 근원인 '땅'을 담으려 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땅에 떨어진 돌멩이, 나무껍질과 이끼,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이슬이 내 작품의 소재"라며 "내 작품은 결국 다 땅하고 연결돼 있다"고 설명했다.
이번 전시선 그가 초창기에 만든 작품들도 볼 수 있다.
그는 디자이너라면 '예쁜 옷'을 넘어 자신만의 색깔을 의상에 담을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옷만 봐도 '한혜자가 디자인했구나'라고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그가 주름진 천인 '크링클'(crinkle)을 즐겨 쓰는 것도 이 소재가 '땅'을 표현하는데 적합하다는 생각에서다.
"아무리 파는 옷이라고 해도 '이따리아나'라는 브랜드를 달고 있으면 내 성격과 감성이 묻어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는 최근 패스트 패션이 유행하면서 장인 정신을 가진 디자이너들이 줄어드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도 말했다.
그러면서 일흔을 넘긴 나이지만 자신을 명예 디자이너로 추대해준 후배 디자이너들을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솔직히 4~5년 전부터 회의가 들어 계속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는 그는 "이번 전시를 돌아보니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며 "이제는 후배들을 위한 일을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젊고 유망한 후배 디자이너들의 작품을 모은 편집 매장을 세우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그는 "이번 헤라서울패션위크에 참가하는 작가들을 한번 유심히 보려고 한다"며 "젊은 디자이너들에게 판매의 장을 마련해줄 수 있다면 보람될 것 같다"고 말했다.
전시는 11월 9일까지 계속된다.
관람료 무료.
lucid@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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