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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현 "그저 견디면서 살아가는 게 도시의 삶"
9년 만의 소설집 '상냥한 폭력의 시대' 출간

(서울=연합뉴스) 김계연 기자 = "제가 살고 있는 사회가 많이 변했잖아요. 10년 전만 해도 내일은 더 나아질 거라는 믿음이 있었는데 지금은 사람들이 그런 생각 자체를 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이기기 위해 남을 밟고 올라가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면 지금은 부풀려서 보여주지 않으면 무시당하고 배제되기 때문에,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애쓰죠. 허풍을 떠는 게 아니고요."
차가운 도시생활의 단면을 냉소와 위트로 기록해온 작가 정이현(44)이 소설집 '상냥한 폭력의 시대'(문학과지성사)를 냈다. 단편집으로는 2007년 '오늘의 거짓말' 이후 9년 만이다. 2013년 겨울부터 올해 봄까지 여러 문예지에 발표한 단편 7편을 엮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고르고 보니 전부 최근 3년 사이에 쓴 작품이었다고 한다.
2002년 '낭만적 사랑과 사회'로 데뷔한 이래 그의 작품에는 줄곧 위악과 속물근성으로 무장한 '차도녀'가 트레이드 마크처럼 등장했다. 감각적 필치는 여전하지만, 등장인물들이 삶을 대하는 태도는 도시가 요구하는 방향에 따라 진화했다. 위악과 위선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데 위선 쪽에 좀더 가깝다.


"큰일만 없이 견디면서 살아보자는 인물들이에요. 그런 현실에서 위선적인 면들이 강조되는 모습이 많은 것 같아요." 등장인물들은 작가를 따라 나이도 그만큼 먹었다.
'안나'는 의사를 남편으로 둔 전업주부 '경'이 8년 전 댄스동호회에서 스친 '안나'를 재회하는 이야기다. 안나는 댄스동호회 시절 경이 마음에 뒀던 남자 멤버와 스캔들을 일으켰다. 나이가 가장 어리다는 이유만으로도 질투의 대상이었지만 과거를 떠올려보던 경은 순순히 인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박수를 받을 일이 나이뿐이라니, 왠지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198쪽)
두 사람은 고급 영어유치원에 아들을 보낸 학부형과 유치원 보조교사로 다시 만난다. 댄스동호회 시절에는 둘이 딱히 대화해본 적은 없었다. 경은 유치원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들 문제로 상담을 받으며 안나와 가까워진다. 안나는 이제 도움을 주는 존재가 됐으므로 세속적 교환법칙에 따르면 친해지는 게 당연한 일이다. 물론 안나가 유치원에서 작은 사고를 일으키면서 멀어지기도 한순간이었다.
안나는 작가가 말하는 '상냥한 폭력'이 뚜렷이 드러나는 인물이다. 남 앞에서는 예의 바르고 절대로 나쁜 말은 않지만, 돌아서면 그만이다. 다른 작품에 나오는 인물들도 대체로 그렇다. 작가는 소설집 제목에 대해 "등장인물들은 상냥한 폭력을 당하거나 자기도 모르게 상냥한 폭력을 자행하면서 가해자와 피해자를 왔다갔다 한다. 인물들을 이렇게 묶어 시대를 명명해본 것"이라고 했다.
'우리 안의 천사'에도 예외없이 속물적 인간들이 등장한다. '미지'는 애완견 수술비 문제로 동거남과 신경전을 벌이다가 결국 따로 살기로 결심한다. 이때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든 돈뭉치가 관계를 180도 돌려놓는다. 갑자기 나타난 동거남의 이복 형은 자산가인 아버지의 죽음을 약물로 앞당기고 재산을 나눠갖다고 제안한다. 미지는 머뭇거리는 동거남의 등을 은근히 떠민다.
등장인물들은 대형 로펌 변호사와 공중파 방송국 간부를 들먹이며 유치원비를 환불받을 정도로 현대사회의 규칙을 체화한 존재다. 대단히 기쁘거나 슬픈 일 없이 "이런 시대에 이렇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10쪽)하며 그럭저럭 관성에 몸을 맡긴다.
최악만은 피하지만 불안감을 제 것처럼 떠안은 채 사는 도시의 일상은 '우리 안의 천사'에서 미지의 독백에 요약돼 있다. "내가 잠시 한눈을 팔아도 세상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단죄가 또 유예되었다는 사실에 나는 안도하고 절망했다. 극적인 파국이 닥치면, 속죄와 구원도 머지않을 텐데. 또다시 살아가기 위하여 나는 바다 쪽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뗐다."(97쪽)
작가는 줄곧 작품의 배경이자 핵심 소재로 삼아온, '상냥한 폭력'이 횡행하는 도시생활을 이렇게 정의했다. "하나를 주고 하나를 받아야 하는 삶, 하나를 받으면 하나를 줘야 하는 삶이에요. 사람들 사이의 거리를 지키는 삶이기도 해요."


dada@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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