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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의 세계 '제8기후대'서 성찰하는 예술의 본질
비엔날레 강박관념 벗어던진 광주비엔날레

(광주=연합뉴스) 권혜진 기자 = 분홍빛 쇠사슬 커튼(루스 부캐넌의 '갈라지다, 갈라짐. 갈라지는')을 걷어내고 들어간 전시장 안은 바깥과는 단절된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색색빛깔의 액체가 담긴 와인 잔 사진(아그니에슈카 폴스카의 '휘발유를 담은 유리잔')이 머리 위 높이에서 관객들을 맞는다. 검은색 배경과 대조를 이루며 더욱 몽환적인 빛을 자아내는 액체가 입장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오묘한 색깔에 눈길을 주고 있자면 바로 옆에서 누군가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건넨다. 옆에 설치된 디스플레이에선 동화에서 봤음직한 부엉이가 등장해 관객을 빤히 쳐다보며 이야기를 계속한다.(안 리슬리가드의 '신탁자, 부엉이…어떤 동물들은 절대 잠들지 않는다')

공식 개막일 하루 전인 1일 오후 언론에 먼저 공개된 '2016 광주비엔날레' 전시장은 '제8기후대'라는 이번 전시 제목처럼 현실에는 없는 상상의 공간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느낌이 물씬 난다.
12세기 페르시아 신비주의자이자 철학자인 소흐라바르디가 착안해 20세기 프랑스 철학자 앙리 코르뱅이 다듬은 개념인 '제8기후대'는 고대 그리스 지리학자들이 찾아낸 지구상 7개의 물리적 기후대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 장소로, 일종의 '상상의 세계'를 뜻한다.
올해로 11회를 맞는 '2016 광주비엔날레'는 이런 세계를 일반적 비엔날레 방식을 벗어난 형식으로 풀어낸다.
강렬한 정치적 또는 사회적 메시지를 담아야 한다거나 기승전결식 구성과 스펙터클한 대작으로 화제를 모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 대신 37개국 101작가팀(120명)의 252점 작품을 유기적으로 연결해 펼쳐 보임으로써 현대 미술의 트렌드를 읽고 이번 행사의 부제처럼 '예술은 무엇을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이러한 기획의도는 전시장 구성에서부터 느껴진다.
다른 비엔날레와 달리 전시장에는 작가별로 구분 짓는 파티션이 없으며 시각을 자극하거나 주변 작품을 압도해버리는 대형 설치물 또한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예술의 본질을 조망하고자 한 것이 기획자들의 의도였기 때문이다.
박양우 광주비엔날레 대표이사는 전시회 투어 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인공지능 등의 출현으로 인간 존재 자체가 위협받는 시대에 상업성, 경제논리, 자본주의의 허위를 제거하고 예술의 본질, 무엇보다 인간에 충실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세계 곳곳에서 넘쳐나는 비엔날레와는 다른 광주만의 비엔날레상을 만들고자 했다. 이를 위해 흔히 볼 수 있는 거대하고 위압적인 연출을 하는 전시 큐레이터가 아니라 예술, 인간, 사회에 대한 진지한 시선으로 잔잔한 성찰을 할 수 있는 큐레이터를 물색했다. 머나먼 스웨덴에서 마리아 린드 예술감독을 초빙한 것도 이런 이유"라고 설명했다.
이번 전시를 진두지휘한 린드 예술감독도 예술의 본질을 탐구하고자 하는 기획의도를 살리려 애썼다고 부연했다.
그는 "예술을 중심에 두고자 했다. 지난 20년간 전 세계 미술계는 인프라에 지나친 관심을 뒀다. 이제는 이런 환경이나 인프라 외에 예술 자체에 대해서도 한번 얘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이번 전시가 단순히 예술의 본질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궁극적으로는 '예술은 무엇을 하는가'를 넘어 '이 시대에 예술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로 사유를 확장한다.
린드 감독도 "무엇보다 예술이 할 수 있는 능력을 이야기하려 했다"고 강조했다.
'제8기후대'라는 제목 뒤에 '예술은 무엇을 하는가?'라는 부제가 붙여진 것도 이런 맥락이다.
제1전시실에서 만날 수 있는 도라 가르시아의 '녹두서점-산 자와 죽은 자, 우리 모두를 위한'이 대표적이다.
2011베니스비엔날레 스페인관 참여 작가인 가르시아는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뉴스를 공유하고 시체의 수의를 입히던 이 역사적 장소를 전시장 안으로 고스란히 옮겨 놨다.
서점 안에 전시된 당시 광주시민들이 남긴 글은 배경 지식이 없는 관객들에게도 그 자체만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그러나 이처럼 직접 메시지를 전달하기보다는 예술적 철학이나 미학이 녹아든 작품이 주를 이룬다.
5개 전시장에 나눠 설치된 200여 점의 작품들은 각기 다른 재료와 기법으로 제작됐지만 궁극적으로는 예술의 역할인 '사회와의 매개성'을 고민한다.

이번 비엔날레에선 작품만큼이나 전시 공간도 눈여겨볼 만 하다.
전시장은 린드 예술감독이 이끄는 큐레이터 팀이 공들여 기획한 손길이 느껴진다. 큐레이터 팀은 각 전시실에 조도를 달리해 공간의 차별화를 시도했는데 이러한 아이디어는 미디어아트 작품을 모아둔 제2전시실에서 빛을 발한다.
지난해 베니스비엔날레 참여 작가이자 현대자동차가 영국 테이트모던과 손잡고 진행하는 '현대 커미션' 작가인 필립 파레노의 작품과 2013년 에르메스 미술상 수상자인 정은영 작가의 작품 등이 전시된 제2전시실은 조명을 없애 마치 암실 같은 분위기로 만들어 작품에 대한 몰입도를 높였다.
작품과 작품을 가르는 벽을 없애고 작품 사이에 여백을 둬 사색의 여지를 남겼다.
린드 예술감독은 "의도적으로 참여와 사유의 공간은 여백을 뒀다"고 설명했다.
준비 과정에서부터 참여 작가들과 지역 작가 및 주민을 연계해 일상에서의 예술을 실현하고, 전시 공간을 광주비엔날레 전시관으로 국한하지 않고 지역 미술관 등으로 확대해 지역과 예술의 결합을 시도한 것도 칭찬할 만 하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가 일부에게는 '밋밋함'이나 '느슨함'으로 다가올 여지가 있다.
특히 일반적인 미술관 전시가 아니라 비엔날레라는 점에서 미술관 전시 이상의 화려한 볼거리를 기대하는 관객들에게는 아쉬움이 남는다.
또 1~3전시실은 각각의 색깔이 뚜렷하게 드러나던 전시가 4전시실부터는 힘을 잃고 전시의 주제를 한눈에 가늠할 수 없다는 점도 아쉬운 부분이다.
이날 전시를 둘러본 계원예술대학의 유진상 교수는 "전시 공간을 나누지 않은 점이 신선하다. 전반적으로 전시도 세련됐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강력한 드라마나 매니페스토는 느껴지지 않아 전체적인 맥락보다는 작품 하나하나의 내적인 이야기를 찾아 들어가야 할 것 같다"고 평했다.
광주비엔날레는 2일 개막해 11월 6일까지 66일간 진행된다.

lucid@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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