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군 낙동강 진출 저지, 무명용사·미군 400여명 목숨과 바꾼 '하동전투'
채병덕 전 육군 참모총장도 전사…66년 만에 '무명용사비' 세워 영혼 달래
지성호 기자 = "마을 인근 논에 포탄과 총탄을 맞고 전사한 군인 시신이 많아 그해 농사를 짓지 못했어. 더운 날씨에 부패하면서 악취가 진동했지만 누구도 시신을 치울 엄두를 내지 못했지"
대한민국 6·25참전유공자회 하동군지회 송성호(84) 부지회장은 24일 한국전쟁 발발 한 달여 만에 경남 하동군 적량면 속칭 계동마을에서 벌어진 '하동전투(하동 계동전투)'를 떠올리며 치를 떨었다.
대한민국 6·25참전유공자회 하동군지회 송성호(84) 부지회장
그는 고향에서 농사를 짓다가 갑자기 전장 한복판에 떨어졌다.
그해 11월 그는 육군으로 입대, 수송병으로 부산 등지에서 전쟁을 치렀다.
그는 "당시 포탄에 맞아 팔이나 다리가 떨어진 채 산을 넘어 진주 쪽으로 철수하는 미군 수 십 명을 주민들이 노량항으로 이송했다"고 소개했다.
들것 등 마땅한 이송 장비조차 없는 주민들이 농사용 가마니 양쪽에 나무를 끼운 뒤 미군 부상자를 태워 30리(12㎞)나 걸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노량항에는 여수 등지에서 부상자를 태우고 부산으로 가는 아군 초계정이 운항중이었다.
하동전투를 마지막으로 여수에서 부산으로 운항하는 여객선도 끊겼다.
하동전투는 한국전쟁 발발 한 달 만인 1950년 7월 25일부터 31일까지 하동군 적량면 동산리 속칭 계동마을 인근에서 국군과 미군이 호남을 거쳐 하동을 공격하는 북한군에 맞서 싸운 전투다.
하동 호국공원 전경
영남지구 편성관구 사령부 소속 국군이 미군 제24사단 일부 병력과 함께 북한군 제6사단을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전 육군 참모총장 채병덕 소장이 전사하고 미군 313명, 국군 100여 명이 순국했지만 지금껏 잘 알려지지 않았다.
북한군이 하동과 진주를 거쳐 낙동강 하류 지역으로 진출하려는 것을 저지하려는 7일간의 지연전이었다.
피해가 적지 않은 혈투였지만 결과적으론 패한 전투였기 때문이라고 송 부지회장은 짐작했다.
하동은 서울을 함락하고 남진하면서 섬진강을 건넌 북한군이 진주를 거쳐 한국전쟁 최후의 방어선인 낙동강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이런 이유로 신성모 국방부 장관은 채 소장에게 '하동은 호남과 영남을 연결하는 요지로 반드시 적을 막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하동전투에서 승리하진 못했지만, 진주가 북한군에게 함락되기 전까지 7일간 지연 전투를 벌였다.
결론적으로 채 소장과 한미 양국 군인 400여명이 목숨을 바쳐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할 시간을 벌어 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전투에 참전한 국군에겐 소총 등 무기도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고 식량조차 부족했지만 용감하게 싸웠고 장렬하게 전사했다.
이들은 민간전투부대인 대한청년단 기동대와 새로 편성한 제5사단 15연대 소속 일부 병력인데 전원 전사했다.
대한청년단 소속 기동대는 당시 하동지역 지리산에서 공비토벌 작전을 벌이다 투입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100여명의 이들 국군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어 인적사항도 모른 채 '무명용사'로 남았다.
이에비해 멀리 타국으로 와 전사한 미군들에 대해선 소속 부대인 미군 제24사단에 기록이 남아있어 대조적이다.
국군은 어디서 온 누구의 아들인지, 오빠·동생인지도 모른 채 66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하동군재향군인회는 지난 10일 적량면 호국 공원에 하동전투 참전 무명용사 영현비(靈顯碑)를 세웠다.
하동전투 무명용사 영현비
무명용사비는 높이 2.6m 오석으로 만들어졌다.
비석엔 한국전쟁의 비극과 이곳에서 전사한 한국군 100여 명, 미군 313명의 희생을 기리는 글귀가 새겨졌다.
'이곳에서 거룩하게 목숨을 던진 무명용사들의 붉은 넋을 기리고자 영현비를 세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그대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마음을 새겨 후세에 전하고자 한다' .
호국 공원에는 고 채병덕 장군 전사비, 미군 313명 추모비가 따로 세워져 있다.
전 육군참모총장 채병덕 장군전사비
shchi@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2016/06/24 07:00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