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로 2022년 5월, 한국에서 발행된 테라USD(UST)는 단 72시간 만에 1달러 페그가 붕괴하며 600억 달러의 가치가 증발했다. 그런데 지니어스법은 최소 2조 달러 시장을 만들려고 한다. 테라의 33배 규모다. 설상가상으로 스테이블코인들은 서로 맞물려 있다. A사 코인을 담보로 B사가 대출하고, 그 대출로 C사가 코인을 발행한다. 복잡한 파생상품이 만들어진다. 한 곳이 무너지면 연쇄반응은 기하급수적일 수밖에 없다.
'100% 담보'라는 안전장치는 모든 발행자가 같은 자산에 의존할 때 오히려 독이 된다. 미 국채라도 예외는 아니다. 구조적 금융위기 시, 각 시장 주체들의 손실 최소화를 위한 부정적 연쇄반응은 위기의 진폭을 더욱 크게 만들 가능성이 높다.
파편화된 감독 체계, 규제 회피만 부추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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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렌치 힐 하원 금융서비스 위원장이 지난 17일 미국 워싱턴 DC의 국회의사당에서 암호화폐 유형을 입법화하는 '지니어스 법'이 통과된 후 연설하고 있는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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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니어스법의 규제 체계는 겉보기엔 체계적이다. 100억 달러 미만의 스테이블코인은 주정부가, 그 이상은 연방정부가 감독한다. 이중 안전장치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상은 정반대다. 이는 50개의 구멍이 뚫린 그물과 같다.
미국에는 50개 주가 있고, 각 주마다 금융 규제 철학이 다르다. 뉴욕은 악명 높은 '비트라이선스(BitLicense)'로 암호화폐 기업을 옥죄는 반면, 인구가 60만 명도 채 되지 않는 와이오밍주는 '블록체인의 천국'을 자처하며 규제를 최소화한다. 델라웨어주는 기업 친화적 법률로 유명하고, 네바다주는 도박산업처럼 암호화폐도 환영한다.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원하는 기업은 어디로 갈까? 당연히 가장 규제가 느슨한 주를 찾아갈 것이다. 이를 '규제 쇼핑(regulatory shopping)'이라 부른다. 99억 달러 규모로 사업을 제한하면, 느슨한 주 정부의 감독만 받으면 된다. 100억 달러가 되는 순간연방 감독을 받아야 하니, 굳이 그 선을 넘을 이유가 없다.
이는 19세기 미국 '자유은행 시대'의 악몽을 되살린다. 당시에도 각 주가 독자적으로 은행을 인가하고 감독했다. 이렇게 각 주에서 은행인가 및 은행권 발행을 감독하자, 미시간 같은 주에서는 사기꾼들이 껍데기 은행을 만들어 가짜 돈을 찍어냈다. 주 정부는 제대로 감독할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 은행 위기는 늘상 반복됐다. 이런 재앙을 겪고 나서야 1908년 연방준비제도를 만들어 은행권 발행을 통합했다.
스테이블코인도 같은 길을 걸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 감독은 은행권 보다 더 어렵다. 와이오밍주 금융당국 직원이 몇 명이나 될까? 그들이 수십억 달러가 오가는 복잡한 디지털 금융을 실시간으로 감시할 수 있을까? 불가능에 가깝다. 설상가상으로 주정부들은 기업 유치 경쟁에 나설 것이다. 일자리와 세수를 원하는 주들이 서로 규제를 낮추는 '바닥으로의 경쟁'이 벌어진다.
문제는 파급효과다. 인구 60만의 작은 주에서 터진 사고가 미국 전체를, 나아가 전 세계를 뒤흔들 수 있다. 느슨한 감독과 부정부패가 만나면 스테이블코인 시장과 국채 시장, 결국 금융시장 전체가 도미노처럼 무너질 수 있다.
연방정부 감독도 허점투성이다. 100억 달러 이상만 관리한다지만, 기업들은 교묘하게 이를 회피할 것이다. 자회사를 여러 개 만들어 각각 99억 달러씩 운영한다면, 기술적으로는 모두 주정부 관할이다. 아무리 기업의 크기가 커져도 연방감독을 받지 않게 된다는 의미다.
'규제가 있으니 안전하다'는 것은 착각이다. 오히려 복잡하고 파편화된 규제는 사각지대만 늘린다. 문제가 터진 후 서로 책임을 떠넘기기 좋은 구조일 뿐이다. 19세기에 이미 실패한 시스템을 21세기에 디지털 옷만 입혀 부활시키는 것, 그것이 지니어스법의 본질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판매하는 암호화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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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스테이블 코인 발생의 지분 60%를 보유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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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니어스법의 가장 충격적인 문제는 트럼프 대통령의 노골적인 이해충돌이다. 트럼프는 스테이블코인 발행사 월드리버티파이낸셜(World Liberty Financial)의 지분 60%를 보유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USD1이 발행 초기부터 수십억 달러 규모로 유통될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이 자신의 사업을 더 확장할 수 있는 법안에 서명하는 전례 없는 상황이다.
화폐의 본질은 신뢰다. 중앙은행이 독립적이어야 하는 이유, 통화정책이 정치로부터 분리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 신뢰 때문이다. 그런데 최고 권력자가 스테이블코인 사업을 하고 있다.
위험은 명백하다. 금융 위기가 오면 대통령이 자기 코인만 구제할 수 있다. 노골적 개입이 없더라도 '대통령 코인은 안전하다'는 인식만으로도 시장은 왜곡된다. 투자자들은 기술력 대신 정치적 연줄을 보고 투자하게 된다.
더 큰 문제는 달러의 신뢰다. 달러가 기축통화인 건 미국 시스템의 공정성 덕분인데, 대통령이 자기 사업을 위해 법을 만들고 시장을 키워 사익을 극대화하려는 것이다. 트럼프의 USD1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신뢰는 이미 훼손됐다.
미국 사례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지니어스법은 세 가지 구조적 결함을 안고 있다. 첫째, 모두 미국 국채에 집중되는 담보 구조로 인해 국채 시장이 흔들리면 스테이블코인 전체가 무너진다. 둘째, 50개 주로 쪼개진 규제 체계는 19세기 자유은행 시대의 실패를 디지털로 재현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셋째, 트럼프 가문의 이해충돌 문제는 화폐 신뢰의 근간을 이미 파괴하고 있다.
이는 2008년 금융위기의 판박이다. 마치 안전한 자신인 양 복잡한 구조로 위험을 숨기고, 규제를 무력화하며, 정경유착을 제도화한다. 다만 이번엔 더 크고, 더 빠르며, 더 파괴적일 것이다. 2008년의 교훈은 명확했다. 탐욕이 규제를 압도할 때, 그 대가는 평범한 사람들이 치른다. 지금 미국은 같은 실수를 더 큰 규모로 반복하고 있다.
미국이 '암호화폐 수도'를 자처하며 규제를 푸는 것을 부러워할 필요 없다. 오히려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이재명 정부는 금융혁신이란 미명 하에 성급하게 '한국형 스테이블코인', '원화 연동 코인' 같은 유혹에 빠지지 말기를 바란다. 진정한 금융 혁신은 새로운 상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의 안정성을 지키고 그 시스템에 대한 신뢰를 제고하는 것이다. 지금은 혁신을 외치며 달려갈 때가 아니라, 멈춰 서서 위험을 직시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