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6일에는 이런 일이
신윤복의 '미인도' [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문화 수준이 높은 나라가 낮은 나라에 영원히 합병된 적은 없다"
'간송'(澗松) 전형필이 평생 마음속에 새긴 말이었다고 합니다. 1962년 1월 26일은 그가 56세로 짧은 생을 마친 날입니다.
간송은 서울 종로의 상권을 장악한 당대 최고 거부 출신이었습니다. 조부, 조모, 친형 등이 연이어 세상을 떠 일찍이 큰 재산의 상속권자가 됐습니다. 요즘 가치로 6천억 원 상당이었다고 합니다.
전형필의 방학동 가옥 [연합뉴스 자료사진]
휘문고보와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전후로 우리 문화재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습니다. 불과 20대 초반이었습니다.
그 무렵 오세창과 운명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오세창은 3.1운동 민족대표의 한 사람으로 당대 유명한 학자였습니다. 두 사람 인연으로 겨레의 문화재와 민족정기가 지켜질 수 있었습니다. '맑은 물과 푸른 소나무'라는 전형필의 호도 오세창이 지어 준 것입니다. '문화 독립운동'은 이렇게 시작됐습니다.
전형필과 오세창 [연합뉴스 자료사진]
간송은 아낌없이 거금을 썼습니다. 겸재 정선의 작품부터 심사정, 장승업, 김정희, 김홍도, 신윤복 등 국보급 명작들이 그를 통해 세상에 남게 됐습니다.
겸재 정선의 '풍악내산총람' [연합뉴스 자료사진]
신윤복의 '춘색만원'(위)과 김홍도의 '옥순봉' [연합뉴스 자료사진]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영국인 존 개츠비와의 일화입니다. 수십 년간 일본에 거주하면서 아시아의 도자기에 매료돼 국보급 문화재를 다량 보유한 인물이었습니다.
40대의 전형필 [연합뉴스 자료사진]
40대의 전형필 [연합뉴스 자료사진]
1937년, 개츠비가 갑자기 소장품을 처분한다는 소식을 들은 간송은 바로 날아가 그와 대면합니다. 젊은 나이지만 통 큰 간송의 호기에 반한 개츠비는 "조선인에게 조선의 문화재를 넘긴다는 사실이 기쁘다"고 했습니다. 그때 매입한 대표적인 문화재가 국보 제65호 '청자 기린형 향로', 제270호 '청자 원형 연적'입니다.
청자 기린형 향로 [간송미술관]
간송은 문화를 보는 안목, 지혜, 대담성, 끈질김 등에서 피렌체의 르네상스를 이끈 코시모 데 메디치와 비교됩니다. 나라를 잃은 형편과 한국전쟁의 고난을 고려하면 더 큰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938년, 그는 서울 성북동에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박물관을 완성합니다. 박물관 이름도 오세창이 지었습니다. '보화각'. '빛나는 보물을 모아둔 집'이라는 뜻으로 지금의 간송미술관입니다.
성북동의 간송미술관(보화각) [연합뉴스 자료사진]
1940년에는 문헌 연구를 위해 '한남서림'을 후원했고, 반일 사상이 강했던 보성학교를 인수해 문화교육사업에도 헌신합니다.
일제 말에는 거금을 들여 '훈민정음 해례본'(국보 제70호)을 사들여 한글의 역사성을 밝히는 데 공헌했습니다. 한국전쟁 때는 피란을 가면서도 이를 항상 품에 간직했다고 합니다. 또 문화재가 북으로 이송될 위기도 넘겼고, 부산에 보관하던 중요 유물의 화재도 아슬하게 피했습니다.
휴전 후 재정 위기가 닥쳤지만, 후학 양성과 서민 구제, 문화 예술 체계화를 잊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나쳤던 탓일까요? 1962년 급성 신우염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서울 도봉구 방학동 가옥은 2012년 등록문화재로 지정됐습니다. 복원 전과 후의 모습입니다.
방학동 가옥 복원 전과 후 [연합뉴스 자료사진]
2016년에는 '올드 앤 뉴:법고창신-현대 작가, 간송을 기리다'라는 현대미술전도 열렸습니다.
간송 현대미술전 (2016년) [연합뉴스 자료사진]
그가 평생 전 재산을 털어 지킨 것은 우리 문화의 혼, 역사 정신이었습니다. 이렇게 반문하면 됩니다. "내가 그런 큰돈을 상속받았다면 질긴 열정으로 문화재 구매에 대부분의 돈을 썼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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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2018/01/26 08:30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