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권혜진 기자 = 지난 12일 막을 올린 연극 '이영녀'의 주인공은 당연히 이영녀다.
하지만 연극을 보면 오히려 생계 위협에 내몰린 이영녀를 굴리는 포주 '안숙이네'에 시선이 머문다.
첫 장면에 등장하는 안숙이네의 능청스런 연기가 관객들을 곧바로 극 속으로 끌어들여서다.
안숙이네를 역을 맡은 배우는 이미 연극계에서 유명한 중견 배우 남미정(47)이다.
그녀는 이영녀가 집을 비운 사이 이영녀의 아이들을 업어 돌보는 푸근한 동네 할머니와 성매매 손님과 갈등을 일으키고 돌아온 이영녀의 머리채를 휘어잡으며 패대기치는 포악스러운 포주의 역할을 자연스럽게 넘나든다.
신들린 연기로 1막에만 잠시 등장하는 남미정의 모습은 극이 끝난 이후까지 잔상처럼 남는다.
13일 오후 서울 용산구 서계동 국립극단 건물에서 연합뉴스와 만난 남미정은 "안숙이네도 평범한 삶을 살고픈 여성이었을 것"이라며 자신의 배역에 애정을 드러냈다.
대본에 묘사된 안숙이네는 '부모의 강제로 어두운 상업을 계속하나 어느 부산놈에게 창자를 갉아 먹힌 뒤로는 다시 행운이 돌아오지 못하고…(중략)…세상이 흑이면 나도 흑이 아니고는 이 세상에서 살아갈 길이 없다는 것을 믿게 돼 소위 뚜쟁이 노릇을 시작한' 인물이다.
남미정은 "지문을 볼 때 안숙이네는 아마 부산놈에게 여성성을 박탈당한 것 같다"면서 "이런 맥락에서 안숙이네의 모성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악덕 포주로 돌변하는 장면에 대해 "안숙이네도 결국은 피해자이자 가해자"라며 "그런 지점이 바로 이영녀를 대하는 태도에서 나타난 것 같다"고 해석했다.
그는 한국 최초의 자연주의 희곡을 90년 만에 무대에 올리는 의미있는 작업에 참여한 자체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는 "대본을 처음 보고 김우진이라는 극작가가 90년 전에 이런 작품이 썼다는 사실에 놀랐다. 알면 알수록 많은 게 담긴 화수분 같은 작품에 하면 할수록 욕심이 난다"며 "이 작품이 앞으로도 계속 공연됐으면 좋겠다"고 힘줘 말했다.
역할에 맞춰 저음으로 발성하면서 자신의 가장 낮은 목소리를 찾아냈다는 그는 이번 작품을 준비하면서 연기력이 한발짝 더 나아간 것 같다고 말했다.
'오구', '옥단어!', '황금용', '파우스트 Ⅰ+Ⅱ' 등에 출연하며 각종 연극상을 휩쓴 그가 연기력 발전을 얘기하는 것은 의외다.
그는 연기란 조금씩 성장하고 변하는 생물과 같다고 설명했다. 그의 데뷔작이자 대표작인 '오구'에서의 연기를 보면 이런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제가 20대 초반에 '오구'를 시작해 지금까지 하고 있어요. 제 삶과 함께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지요. 20대 때 생각한 삶과 죽음, 시간이 흘러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느낀 삶과 죽음…. 그때그때 처한 상황에 따라 연기가 달라집니다. 앞으로의 연기도 또 다르겠지요."
연극 애호가들 사이에선 "연극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배우" 등으로 평가받지만 스스로는 고민과 갈등이 많았다고 털어놨다.
그는 "왜 고민이 없었겠느냐"며 그런 고민도 결국은 연극으로 극복했다고 말했다.
"20대를 돌이켜보면 연극한 기억밖에 없습니다. 잔잔한 추억거리 하나 떠오르지를 않네요. 극한 작업을 이겨낸 후 무대에서 맛보는 그 쾌감 때문에 지금까지 연기한 것 같습니다."
그는 15년 전부터 연출로 활동 영역을 넓혔다.
2000년 '천국과 지옥'을 시작으로 '물고기의 귀향', '공길전', '자장가', '비내리는 고모령' 등 다수의 연극과 뮤지컬을 선보인 그는 올 연말 또 한 번 직접 연출한 뮤지컬 작품을 내놓는다.
이번에 '이영녀' 출연을 결정한 것도 선배 여성연출가인 박정희 연출가의 작품이어서다. 그는 "박 선생님의 작업을 보고 싶어서 한다고 했다가 극작가 김우진과 작품에 푹 빠졌다. 같은 희극으로 10편을 만들면 10편 다 다르게 만들 수 있겠구나 싶을 만큼 매력적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연출가 남미정'으로선 '배우 남미정'보다 좀 더 광범위한 장르를 시도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실제로 정통 연극부터 아동극, 뮤지컬, 악극, 재활연극까지 다양한 장르에 도전했다.
그는 "아직은 무슨 작품인지보다 그 안에서 어떻게 작업하는지가 더 중요하다"며 "닥치는 대로 다양한 장르를 하다보면 언젠가 의미를 찾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자신만의 연출관을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제가 배우를 오래했으니 배우를 너무나 잘 알잖아요. 제가 연출할 때는 같이 하는 사람들이 모두 텍스트가 되는, 이 사람들의 희로애락이 드러나는 그런 작업을 하고 싶습니다."
lucid@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