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조재영 기자 = "정치적 성향이나 역사적 소명 의식에서 작품을 고르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이야기가 재미있고, 인물의 다양성 등을 볼 뿐이죠."
배우 김상경(47)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생활의 발견', '극장전', '하하하' 등 홍상수 감독 영화가 먼저 눈에 띈다. 나머지는 화성 연쇄살인 사건을 다룬 '살인의 추억', 광주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화려한 휴가', 방산 비리를 다룬 '1급 기밀' 등 사회성 짙은 영화들이다.
다음 달 10일 개봉하는 '열두 번째 용의자'(고명성 감독)는 후자 쪽에 속한다. 한 유명 시인의 살인 사건을 통해 시대의 비극을 조명하는 추리극이다.
1953년 늦가을. 서울 명동의 오리엔타르 다방 안에 있던 손님들은 동료 시인인 백두환이 전날 밤 남산에서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곧이어 사건 수사관 김기채(김상경 분)가 다방에 들이닥치고, 그곳 손님들을 모두 용의자로 지목하면서 조사를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각 인물의 숨겨진 비밀이 하나둘씩 밝혀진다.
'열두 번째 용의자'[인디스토리 제공]
김상경은 살인사건을 수사하는 김기채 역을 맡았다. 처음과 끝이 다른, 가장 극적인 변화를 보여주는 인물이기도 하다. 말쑥한 정장에 신사 같은 태도를 보여주던 그는 어느 순간 본색을 드러낸다.
김상경은 26일 용산 CGV에서 열린 시사회 직후 기자간담회에서 "김기채라는 인물은 악역일 수도 있지만, 그 당시에 자기 생각이 맞고, 정의로운 일을 하고 있다고 믿고 살아온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개인적으로 '화영연화'처럼 1940~60년대 감성을 좋아한다"면서 "이 작품도 굉장히 혼란했던 그 시기를 배경으로, 작은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긴장감 있게 그려 매력을 느꼈다"고 출연 배경을 밝혔다.
김상경은 극을 이끌어가는 화자인 만큼, 상당한 대사량을 소화한다. 그는 "대사가 랩 수준으로 많아서 후회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 외워야 했다"고 떠올렸다.
이 영화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 주로 인물들의 대사로 전개돼 마치 한 편의 연극 무대를 보는 것 같다. 다방 이름에서 짐작하듯 애거사 크리스티 원작 영화 '오리엔탈 특급 살인 사건'을 떠올리게도 한다. 저예산 영화인 만큼 전개가 다소 거칠고, 투박한 장면도 눈에 띈다. 주제 의식을 드러내는 직접적인 대사도 많은 편이다. 그런데도 시대 공기를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생각할 거리를 던지는 데는 성공했다. 나름대로 반전의 묘미도 있다.
'열두 번째 용의자'[인디스토리 제공]
배경이 일제 잔재와 한국전쟁의 전운이 뒤섞인 혼돈의 시기인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화는 해방 후 친일파에 대한 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시점에서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한국 근대사의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고, 그로 인한 문제들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극 중 인물인 화가, 소설가, 시인, 다방 주인 부부, 대학교수 등은 예술가이자 평범한 시민이지만, 시대의 희생양이 된다. 김상경 이외에 허성태, 박선영, 김동영 등도 출연, 탄탄한 연기를 선보였다.
'열두 번째 용의자'[인디스토리 제공]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서태윤 형사 역을 맡았던 김상경은 최근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유력 용의자가 특정된 데 대한 소회도 밝혔다.
그는 "영화를 찍을 때는 피해자들을 위해 찍었다고 생각했는데, 한 TV 시사 프로그램에서 피해자 가족들이 '왜 자꾸 과거 일을 들쑤시느냐'며 힘들어하는 모습을 본 뒤 굉장히 혼란스러웠다"면서 "내가 열심히 하는 게 오히려 안 좋은 건가 싶었다"고 떠올렸다.
그는 "용의자가 특정되고 봉준호 감독님께 '너무 기쁘다'는 문자를 남겼는데, 봉 감독님의 첫마디가 '(영화 속 이름인) 태윤아, 이제 끝났다'였다"고 전했다.
김상경은 "당시 '이 영화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라는 비판적 질문이 나왔을 때 '기억하는 것 자체가 응징의 시작'이라고 답했다"면서 "영화가 있었기에 이제라도 (용의자를 특정하는 게) 가능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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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2019/09/26 16:00 송고